El Anatsui, Seoul (2026)
엘 아나추이
LuwVor
2026년 3월 18일 ~ 4월 18일
엘 아나추이는 (b.1944, 가나 아냐코) 1990년대 후반부터 대형 병뚜껑 작업을 통해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온 작가이다. 그가 금속 폐기물로 직조해 내는 형태와 색채의 장(場)은 확장적이다. 작가는 조각이 제작된 순간의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설치된 장소와 방향에 따라 시시각각 반응하고 변화한다는 점에 주목하며 작품의 잠정적인 사물성을 포착한다. 화이트 큐브 서울과 홍콩에서 동시에 선보이는 금속 신작은 이러한 조각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하나의 작업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작품이 내포하는 방향성과 이중성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번 신작은 아나추이의 금속 작업 가운데 최초로 완전한 상호성의 논리에 따라 구상되고 전시되도록 기획된 작품이다. 조각의 양면은 어느 한 면이 다른 면보다 우선시 되지 않으며, 서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다. 병뚜껑의 안쪽 면이 미묘한 단색조의 은빛으로 반짝이는 가운데, 브랜드가 인쇄된 반대편은 대지를 연상시키는 흑색, 갈색, 황색과 산화된 적색이 어우러지며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벽에 고정되기보다 공간 안에 자연히 흐르도록 드리워진 조각의 양면성은 방향성이 고착될 틈을 주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에 주목하게 한다. 절단되고 납작하게 펴지고 접힌 뒤 구리 철사로 엮인 수많은 병뚜껑이 축적되어 형성된 구조는, 노출된 이음부를 통해 두께와 틈, 그리고 봉합의 흔적을 드러낸다.
이 금속 작업이 제시하는 형식에 대한 탐구는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되어 온 것이다. 조각을 시작한 이래 작가는 재료의 물질적 조건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집중해 왔다. 1944년, 당시 유럽에서 ‘골드 코스트’로 불리던 가나에서 태어난 작가는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학교에 진학해, 영국 식민지 교육 체제 아래 서구 모더니즘 양식에 기반한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후 1975년 나이지리아 대학교의 교수직을 제안받고 나이지리아로 이주했다. 당시 그곳은 탈식민주의 예술 형식과 재료 실천, 문화적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의 중심지였으며, 아나추이는 예술가, 작가, 사상가들과 함께 기존의 관습을 재검토하며 탈식민 시대에 상응하는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아나추이가 제도권 미술의 틀을 처음으로 깬 것은 1970년대 초 나이지리아로 이주하기 전에 시작한 원형 목판 작업이었다. 그는 가나의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쟁반 위에 선형 기호를 새겨 넣음으로써 조각적 관심을 ‘양감(volume)’에서 ‘표면(surface)’으로 옮겨왔다. 그가 구현한 기호는 아칸 부족이 격언과 철학적 개념을 형상화하기 위해 대대로 사용해 온 상징체계인 아딘크라에서 따온 것이었다. 곧이어 점토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그는 목판 작업의 한계를 넘어 조각의 사물성에 대한 급진적인 사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깨진 항아리(Broken Pots)’ 연작을 비롯한 1970년대 후반 테라코타 작업은 파열과 재조립을 통해 탄생했다. 그는 다양한 점토 파편들을 거칠게 덧대고 붙여 접합면이 그대로 노출된 그릇을 만들었다. 온전한 형태를 이룬 적 없는 이 형상들은 원상태로의 복원을 전제하는 논리에 저항하며, 해체와 재구성을 생산적인 조형 행위로 전환하는 창작 방식을 제시한다. 이는 작가를 짓누른 탈식민 시대의 압박감을 오롯이 반영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훗날 아나추이는 ‘깨뜨린다는 발상은 개혁의 기회이며, 이는 파괴가 아닌 재탄생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성찰한다.1 이러한 그의 사유는 아칸 문화의 ‘산코파(Sankofa)’와도 일맥상통한다. ‘되돌아가 찾는다’는 뜻인 ‘산코파’는 과거가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이라는 탈식민주의적 신념을 대변하며, 아나추이의 예술관의 근간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금속 조각은 과거로부터 계승된 감각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조형 언어로 확장된다. 파편화는 형식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이음새와 접합, 축적된 조각들은 하나의 광대한 표면을 형성한다. 형성된 표면은 완결되지 않은 상태로 장소와 방향, 전시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된다.
아나추이가 지향하는 조각의 조형적 원리인 열린 구조는 금속 작업에서 특히 두드러지지만, 그 기원은 1980~90년대 목판 부조 작업에 있다. 그는 단단한 폐목 판재를 수집해 절단하고, 태우고, 전동 공구로 표면을 깎아 내 기계의 거친 힘과 남겨진 상흔을 작품의 조형적·구조적 언어의 중심에 배치했다. ‘깨진 항아리’ 시리즈와 초기 목판 부조를 통해, 아나추이는 금속 작업으로 이어지는 조형적 과정 안에서 조각을 하나의 통합된 덩어리로 보는 통념을 거부하고, 부분들의 결합을 통한 구축을 지향한다. 절개, 그을음, 칠, 나뭇결로 구별되는 각 목판은 나란히 배치되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이 부조들은 가변적인 조립 구조로 설계되어, 전시마다 목판의 배열 순서를 달리함으로써 새로운 조합이 가능하다. 나무라는 소재의 단단함 때문에 이러한 가변성에는 제약이 따랐지만, 작가는 목판 부조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칙을 확립했고, 이는 이후 금속 작업에서 보다 자유롭게 구현되었다. 작품이 설치된 방향, 드리워진 모양, 중력과 환경에 따라 형태가 매 순간 새롭게 결정되고, 윤곽과 규모 그리고 공간과 맺는 관계가 영원한 유동성을 갖게 된 것이다.
화이트 큐브 홍콩과 서울에서 선보인 작품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것은, 버려진 사물을 재활용하는 익숙한 연금술도, 변형(metamorphosis)을 위한 기존의 방법론적 사고도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변형을 가능하게 한 조건들이 얼마나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제시되었는 가이다. 버려진 술병 뚜껑이 담긴 자루에서 영감을 받은 ‘남자의 옷(Man’s Cloth, 1999-2002)’과 ‘여자의 옷(Woman’s Cloth, 1999-2002)’이 금속 작업의 출발점이었고, ‘로고리지 로가리듬(Logoligi Logarithm, 2019)’과 같은 대형 설치 미술은 주어진 환경에서 금속 작업이 지닌 확장성과 공간적 영향력을 어느 정도 시험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공간 안에서 자율적으로 서 있는 듯한 형태를 취하며 그간의 탐구 방향을 재설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작품은 명확한 경계를 가진 평면체로 보이지만, 작은 틈새와 원형의 구멍, 불규칙한 분리의 끊김 지점에서 철사나 구조체, 혹은 공허감이 돌연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은 앞으로 다른 공간에서 새로운 모습과 구성으로 관객을 만날 것이다. 치카 오케케-아굴루와 오쿠이 엔위저는 아나추이의 예술에 관한 종합 연구서 ‘조각의 재발명(The Reinvention of Sculpture, 2022)’에서 그의 작품은 전시마다 ‘새로운 형상’으로 인식되며, 이때 각 형상은 ‘이론상 영생이 가능한 존재가 진화하는 과정을 식별하게 해주는 표지자(distinct markers)2’라 평했다. 작품이 설치될 때마다 종착이 아닌 회귀로 이해되는 순환적 시간관 속에서, 아나추이의 작업은 어떠한 상태도 영원하지 않다는 서아프리카의 오랜 철학적 통찰을 형상화한다.
1 El Anatsui: Behind the Red Moon, Tate Publishing, 2024, p.90의 작가와 오세이 본수의 대화에서 인용
2 El Anatsui: The Reinvention of Sculpture, Damiani, 2022, p.268 치카 오케케-아굴루와 오쿠이 엔위저
화이트 큐브 홍콩 에서도 엘 아나추이의 전시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주요 작품
아래 사진을 통해 각 작품의 정면과 후면을 보실 수 있습니다.
El Anatsui
LuwVor I, 2025
El Anatsui
LuwVor II, 2025
El Anatsui
LuwVor III, 2025
El Anatsui
LuwVor IV, 2025
작가 소개
El Anatsui, Hyundai Commission: El Anatsui: Behind the Red Moon, 2023, © El Anatsui. Courtesy El Anatsui Studio
엘 아나추이(b.1944, 가나 아냐코)는 가나와 나이지리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1965-69년에 콰메 은크루마 과학기술대학교에서 수학했고, 1975년부터 나이지리아 대학교 은수카 캠퍼스 미술학과 조소 담당 교수로 40년 넘게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주요 국제 개인전은 영국 에든버러 탤봇 라이스 갤러리(2024), 런던 테이트 모던(2023), 독일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2019), 케이프타운 이지코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미술관(2018), 미국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2015), 런던 왕립 미술원(2013), 미국 오하이오 애크런 미술관(2012), 캐나다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2010), 일본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2010),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 아프리카 미술관(2008) 등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2013년 찰스 월러스턴 상,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공로상, 2017년 프리미엄 임페리얼 상 조각 부문 등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한 바 있다.
화이트 큐브 홍콩 에서도 엘 아나추이의 전시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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